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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테이네이 이야기] #5-2 테이네이가 하나가 되기까지의 이야기②

츄라라 2024. 3. 20. 12:18

 

 

じゃこ │ https://www.pixiv.net/artworks/104365282

 

작가 : じゃこ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7737567#2

 

#5 テイネイが一生一緒になるまでの話※キャプション必読 | 幸せなテイネイの話 - じゃこの小

着替え、タオル、レース用シューズ、財布、家の鍵、パスケース、コスメポーチ、突然の頭痛や腹痛に備えての薬。 それにハンカチ、ポケットティッシュ。 ……うん、おっけ、忘れ物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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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냄새가 났다.

눈꺼풀을 뜨자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새하얀 천장이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팔에 힘을 주어 상반신을 일으키자, 왼 다리에 깁스가 둘리어 있는 것이 보였다.

 

「또……」

 

한동안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새하얀 병실을 둘러보고 여기가 개인실이겠거니 짐작했다.

서랍이 달린 탁자 위에는 내 배낭이 놓여 있었고, 그걸 본 순간 마야노와 병합 레이스를 하던 도중 쓰러졌던 것이 떠올랐다.

마야노의 모습을 찾아 다시 한번 병실을 둘러봤으나, 역시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병실 밖에서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그곳엔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이는 네이처와, 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마야노가 있었다.

 

「여어.」

 

인사를 건네자 네이처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후, 마야노가 구급차를 부른 후 곧바로 네이처에게도 연락했다고. 만약 마야노가 곁에 없었다면, 나는 한여름의 태양 빛에 불타 열사병이나 탈수 증상을 일으켜 목숨까지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고마워」라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자, 마야노는 「테이오 쨩이 무사해서 다행이야」라며 웃었다.

주홍색 빛이 새하얀 병실을 채우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 창밖을 바라보니, 그토록 열정적으로 빛을 내뿜던 태양은 이미 기울고 석양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하고 잠깐 기다리자 백의를 걸친 여의사와 저녁 식사를 든 간호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후 예정에 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마야노는 「몸조심해」라는 말만 남긴 채 병실을 떠났다.

 

「가족분이신가요?」

 

선생님이 네이처에게 그리 물어보시길래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제…… 그, 저와 동거 중인 사람이라서요.」

 

그렇게 말하자 선생님은 더 말씀하시지 않고, 가지고 온 서류를 펼쳐 나와 네이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자 하니, 역시나 왼쪽 다리 골절이었다. 이미 3번이나 부러졌었던 그곳이 이번으로 네 번째 골절을 겪은 것이었다.

전치 5개월. 한 달간은 입원이 필수라고.

그리고 레이스 복귀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야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 골절이니 이런 말을 듣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여태까지 몇 번이든 부상을 극복해 왔다. 이번에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선생님이 병실을 떠난 후, 네이처는 후식으로 사과를 베어 물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에, 왜? 왜 웃는 거야?」

「그게, 의사가 포기하라는데 풀죽기는커녕 의욕이 넘치는 네 얼굴이 너무 너다워서 웃겨서.」

「그거야 뭐, 나는 토카이 테이오니까.」

「네네. 저도 최대한 보좌해드리지요. 일단 내일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가져올게.」

 

그렇게 말하며 네이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 돌아갈 거야?」

「면회 시간은 8시까지거든.」

「……아직 10분 정도 남았는데?」

「아슬아슬할 때까지 앉아 있는 것도 좀 그렇잖아.」

 

네이처의 말이 전적으로 맞지만, 나는 그녀를 웃으며 보내줄 정도로 속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 보내는 밤은 너무 오랜만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쓸쓸하다.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이처는 웃었다.

 

「내일 또 올게.」

「응……」

「정말, 그런 표정 짓지 마.」

「하지만, 읏……」

 

내 말은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 지 몇 초나 흘렀을까. 떨어지는 입술이 보였다. 그 순간 보인 그녀의 눈동자엔 그늘이 져 있었고,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이 다시 한번 입술을 맞댔다.

 

「……이제 기운 좀 나?」

 

이마를 톡 맞대고, 네이처는 볼을 희미하게 물들이며 수줍음을 표했다.

가슴이 시끄럽게 고동치는 와중 「응」이라 짧게 대답하자, 만족한 듯이 웃더니 「그럼 내일 보자」란 말만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참기 힘들 정도로 외롭고 불안했는데,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역시 네이처의 키스는 나를 절호조로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다음날, 네이처는 약속대로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병문안을 와 주었다.

갈아입을 옷과 수건, 칫솔과 컵, 곽 티슈에 세안 도구뿐만 아니라 이어폰과 휴대용 게임기, 기타 등등.

곽 티슈, 이어폰, 게임기는 내 손이 닿을 만한 위치에 놓아 주었고, 다른 물건들은 병실 안에 있는 수납장에 정리해 줬다. 그러고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별안간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있던 사람은.

 

「오랜만이구나, 테이오.」

「회장?!」

 

순백의 와이셔츠를 빼입은 회장이었다. 오른손에는 검은 양복을, 왼손에는 노란색과 주홍색으로 수놓아진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테이오는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불러 주는구나」라며 웃어 보이는가 싶더니, 나와 네이처를 번갈아 보며 눈썹을 내리고 조금 미안한 듯한 기색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군. 내가 방해를 해 버렸나?」

「아,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아, 여기 편하게 앉으세요!」

 

네이처가 황급히 일어나 벽에 기대어 놨던 철제 의자를 펼쳐 자리를 만들자, 회장은 고맙다며 거기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 상태는 어때?」라고 물으며 꽃바구니를 건네줬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바구니를 품에 안으며, 질문에 대한 답을 이었다.

 

「전치 20주래.」

「그렇군……」

「회장도 참…… 내가 달리기를 관둘 일 따위 없으니까,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회장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리고 나를 비춘 눈동자가 천천히 호선을 그려, 놀라움은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회장, 해외로 나갔던 거 아니었어?」

「아아, 어젯밤까지는 이탈리아에 있었다.」

 

회장은 현재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과 거래를 취하는 기업인 만큼 직접 해외로 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으므로, 최근 몇 년간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적이 많았다.

 

「지금 일본에 있다는 건 일이 끝났다는 거네?」

「일단은 그렇지.」

 

회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얕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네이처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말문을 다시 열었다.

 

「나이스 네이처.」

「넷, 네.」

「후훗, 그렇게 어려워할 것 없어.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네, 루돌프 씨도요.」

「지난번에 보내 준 채소들은 정말 맛있더군. 감사를 표하지.」

「아뇨, 제가 더 감사하죠. 저희 둘이 다 먹기엔 많은 양이었는데 흔쾌히 받아 주신 덕에 살았어요.」

 

네이처가 상점가 사람들을 도와줄 때마다 우리 집 식량이 늘어간다.

나는 아직 많이 먹을 수 있지만, 네이처는 학생 때와 비교하면 먹는 양이 상당히 많이 줄었다. 내가 많이 먹을 수 있다고는 해도 한계는 있기 마련. 따라서 하루가 다르게 냉장고 안은 지층이 늘어만 갔고, 지금은 포화 상태라 불러도 될 지경이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걸 어쩐다.

네이처와 이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이야기하던 중, 마침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에어 그루브에게서 온 메시지.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둘은 어느샌가 깊은 친분을 다진 것으로 보였고, 그때 이걸 나눠주는 건 어떠냐는 방법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렇지,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네?」

「테이오와 함께 생활하며 불편한 점은 없나?」

「엣, 잠깐 회장, 그런 걸 내 앞에서 묻는 거야?」

 

볼을 부풀린 나를 신경 쓰지도 않고 회장은 네이처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네이처도 「없어요」라고 바로 대답하면 좋았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동자를 바닥에 향한 채 입술을 씰룩였다.

그 모습을 보고, 혹시 여태 혼자 불만을 삭이고 있던 건 아닐까, 내가 곤란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이 마음을 좀먹었다. 침묵이 괴롭다.

 

「……불만이 없다, 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도 테이오에게 그런 부분이 분명 있을 테니, 어차피 피차일반이라고 해야 할까요…… 뭐, 너무 오래 같이 지낸 탓에 이젠 좀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회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자, 네이처는 번쩍 고개를 들어 회장과 나를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는 잠깐 마실 것 좀 사 올게요~」라며 기어코 병실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문에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긴 회장은, 싱긋 웃었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아 안심했어.」

「……회장, 오늘 조금 짓궂은 것 같은데?」

「글쎄, 과연 어떨지…… 그나저나 둘이 같이 살기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난 거지?」

「으음…… 일 년 반 정도인가?」

「그렇군……」

 

내 대답을 듣더니 회장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몇 번을 불러 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맘에 안 드는 대화라도 있었나? 내심 조마조마하면서 회장의 말을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오른쪽 귀가 쫑긋 움직이며 눈동자가 다시 빛을 머금었고, 그 눈동자는 오롯이 나를 담고 있었다.

 

「결혼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건가?」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야. 아니, 오히려 얼마 전에 프러포즈할 생각이었어.」

「할 생각이었다고?」

「응…… 그런데 이렇게 또 골절돼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됐으니, 말끔히 낫고 나서가 아니면 꼴사납잖아.」

「그것도 그렇군.」

 

뭘 상상한 건지 회장은 왼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 순간, 반짝 빛나는 약지가 눈에 들어왔다.

 

「회장은 결혼해서 행복해?」

 

의문 어린 질문을 던지자, 회장은 눈가에 다정함을 가득 담아 미소 지었다.

 

「그래, 행복해.」

「……그렇구나.」

 

어떤 때가 행복해? 같은 물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회장의 목소리, 표정, 말투, 그 모든 것에 행복함이 묻어나와서, 나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이만 업무로 돌아가야겠어.」

「엣, 벌써 돌아가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서류를 처리해 두고 싶거든. 나이스 네이처에게 안부 인사를 부탁하지.」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네이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실 거를 사러 대체 어디까지 간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문을 열던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게 해 버려서 미안하군.」

「아, 아뇨……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회장의 뒷모습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네이처가 딱 맞추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 커피, 받아 가도 될까?」

「아, 네. 여기요.」

「고마워.」

 

「다음번에는 에어 그루브와 함께 오도록 하지」라는 말을 남기고, 회장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그대로 병실 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에 맞춰 교대하듯이 네이처가 돌아왔다.

 

「정말~ 늦었잖아, 네이처.」

「응, 미안…… 그, 이 병원은 그다지 와 본 적이 없다 보니까 조금 헤맸거든…… 단 거랑 안 단 거, 어느 게 좋아?」

 

그 질문에 주저 없이 「단 거」라고 대답하자, 네이처는 「역시나」하고 웃으며 차가운 물방울이 서린 오렌지 주스 페트병을 나에게 건넸다.

 

 


 

 

언제부터인가 그토록 시끄럽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기온도 제법 떨어져 나뭇잎들이 춤을 추며 떨어질 무렵에 들어서야 나는 퇴원할 수 있었다.

입원 중 여러 사람이 병문안을 와 주었다.

네이처는 물론이고 마야노와 브라이언, 회장과 에어 그루브에 이어 예전에 팀 스피카의 멤버들이었던 스페 쨩이나 스즈카, 보드카, 스칼렛, 맥퀸, 골드쉽에 트레이너까지.

터보 사부에다가 이쿠노, 탄호이저도.

게다가 우리 부모님과 네이처네 어머님에 상점가 주민들까지 번갈아 가며 자주 방문해 준 덕분에 그다지 지루하진 않았다.

하지만 밤이 오면 혼자가 되는 건 늘 똑같았으므로, 그 시간만큼은 지루하고 외로웠다.

평소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온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동안 혼자만의 밤을 보냈다.

그리고 겨우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감동한 건, 네이처가 차려 준 밥이 너무 맛있었다는 거다. 병원 밥이 맛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양념이나 조리 방법이 달라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곁에 네이처가 있어 준다는 점. 그 사실이 다른 무엇보다 기뻤던 나머지, 집에 돌아오고 일주일 동안은 그녀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 뒤로도 네이처에게 도움을 받으며 목발로 재활을 계속해야 했고, 통원 2개월 만에 드디어 깁스를 풀 수 있었다. 오랜만에 실물로 본 왼 다리는 심하게 야위어 있어서 마치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깁스를 풀었다 한들 다리가 완치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보조 도구를 장착하고 본격적인 재활 훈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에 이르러서야 내 체력과 근력의 저하를 실감했다.

계단을 한 칸 오르기만 해도 다리가 더 올라가질 않았고, 무엇을 하든 시간도 오래 걸리고 금방 숨이 찼다.

그러고 보니 학생 때도 이랬었지…….

옛날을 회상하며 나는 한 달, 그리고 또 한 달간 재활 훈련을 계속했다. 이윽고 겨울이 찾아왔을 때는 더 이상 목발도 보조 도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완치』라고 말씀하신 건 새해를 맞고 2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드디어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의욕에 불탄 나는 최소한의 메뉴를 짜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했다. 처음에는 그 메뉴를 전부 해내지 못했으나, 그건 예상한 바였다.

초조해도 어쩔 수 없다. 우선은 착실한 운동으로 이전의 힘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며 스스로 다급한 마음을 달래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트레이닝에 힘썼다.

 

 

TV에서 트윙클 시리즈 사츠키상 특집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나는 내 몸의 변화를 깨달았다.

 

「하아…… 하아……」

 

전에 마야노와 병합 레이스를 했던 시영 레이스장. 요즘엔 여기가 내 연습장이었다.

벌써 며칠째 여기 와서 달리고 있다.

지금도 2000m를 달리기 시작한 참, 아니, 달리려고 했다.

출발하고 1000m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100m, 200m 나아가다가 내 다리는 속도를 잃고 결국 멈추고 말았다.

 

달릴 수 없어.

 

일상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근육은 다 돌아왔다. 하지만 달리기 위한 근육이 그 이상 붙지 않았다.

지금까지 달릴 수 있었던 거리를 완주할 수 없게 됐다.

레이스를 완주할 힘이 돌아오지를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렸다. 대체 뭐가 부족한 걸까. 트레이닝 메뉴를 재검토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엄격하게 해야 하는 걸까.

답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머리를 싸매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건 없었다. 태양의 반대편으로 점점 늘어나는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 잔디 위를 달렸다.

 

 

 

집 현관문을 연 건 오후 9시가 넘어서였다.

평소에는 늦어도 8시쯤엔 돌아왔지만, 오늘은 그것보다 더 늦게 돌아와 버렸다. 따로 연락을 하진 않았으니 네이처가 화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심 조마조마하면서 「다녀왔어」라고 인사하자, 곧바로 네이처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와」라며 미소를 짓는 걸 보고 안심하긴 했으나,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오늘은 늦게까지 했네.」

「달리는 데 너무 푹 빠져 있었나 봐.」

「……그랬구나.」

 

거실로 가 보니 테이블 위에 두 사람분의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라, 혹시 기다려 준 거야?」

「같이 먹는 편이 더 맛있잖아?」

「……고마워.」

「응. 지금 데워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네이처가 준비해 주는 동안 나는 손 씻기와 가글을 끝내고 트레이닝 때 썼던 운동복과 수건을 배낭에서 꺼내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오늘 메뉴는 콩소메에 넣고 끓인 롤드캐비지와 아보카도가 터질 만큼 들어간 대용량 콥샐러드.

네이처가 담아 준 밥은 고슬고슬하니 오늘도 정말 만족스러웠다.

재료로 쓰인 양배추와 아보카도는 오늘 상점가 주민들에게서 받은 것으로, 사실 이렇게 먹고도 아직 산더미만큼 남아 있어 도저히 다 먹어 치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내일 또 회장과 에어 그루브에게 보낼 예정이다.

 

『──지금까지, 사츠키상이 코앞으로 다가온 트윙클 시리즈 특집이었습니다. 다음은 주말에 각 지방에서 열린 레이스 소식입니다……』

 

TV에서 그런 얘기가 들려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아나운서가 나 같은 졸업생들이 달린 레이스 결과를 전달하고 있었다.

아는 이름이 꽤 많았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구나. 여태까지 5착만 계속 해 오던 저 친구도 드디어 1착을 따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들렸다.

 

『그나저나 토카이 테이오의 다리 상태가 걱정이네요. 부상은 다 나았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만……』

『골절이니까 바로 돌아오긴 어렵겠죠. 잔디 위로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시 한번 테이오 스텝을 보여 줬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채널이 돌아갔다.

TV에서 눈을 떼고 옆에 있던 네이처에게로 시선을 옮기니,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누르면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널을 몇 번인가 옮기더니 음악 방송에 정착하고 나서야 리모컨을 내려놓고, 작게 한숨을 쉬면서 나를 응시했다.

 

「테이오, 아까부터 손이 멈춰 있잖아. 맛이 별로야?」

 

불안한 듯이 질문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아,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오늘도 진짜 맛있어!」라고 말하고 서둘러 밥그릇에 남아 있던 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빈 밥그릇을 네이처에게 내밀며 한 그릇 더 먹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네네」 하며 웃는 얼굴로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먹을 거야?」

「가득……이 아니라, 으음, 적당히.」

「알겠습니다요~」

 

밥을 담아주는 네이처의 옆얼굴은 부드러웠으나, 조금 전 TV를 바라보던 얼굴엔 슬픔과 사나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달간 네이처의 슬퍼 보이는 얼굴을 자주 봤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아직 레이스에 복귀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챈 네이처가 「왜 그래?」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그냥 가득 먹을래.」

 

네이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웃으며 그리 말했더니, 그녀는 웃음꽃을 피우며 과할 정도로 밥을 담아 주었다.

 

 


 

 

사츠키상과 일본 더비가 끝나고 다시 장마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제까지 거센 비가 끝을 모르고 내렸으나, 어제부터는 가랑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여 오늘은 체육관이 아니라 평소 쓰던 레이스장에서 달리기로 했다.

몸 상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스를 향한 정열은 식지 않았다. 아침 조깅도 트레이닝도 매일 빼먹지 않고 진행했는데도 달릴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전까지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할 수 없게 된다. 달릴 수 있었던 거리를 달릴 수 없게 된다. 몸이 따라오지 않게 된다.

 

그 은퇴한 우마무스메가 말한 그대로의 현상이 내 몸에도 찾아온 것이었다.

사실은 일찍이 눈치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을 하며 지금까지 트레이닝을 계속해 왔으나,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도 슬슬 벅차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날이 지날 때마다 다리는 무거워졌다. 예전과 같은 힘으로 땅을 박차도 그때만큼의 추진력을 얻을 수 없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타임이 늦어지는 것 같기까지 했다.

 

「하앗…… 하아…… 하아……」

 

오늘도 다리가 멈췄다.

폐가 아프고 손발이 무거웠다.

이러면 안 돼. 더 달려서 체력을 길러야 해. 얼른 다시 달릴 수 있게 돼야 해.

요즘은 전보다 더 혹독한 트레이닝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오버워크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테이오.」

 

갑자기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네이처가 보였고, 「왜 여기에」라고 말하자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지금이 대체 몇 시인 줄 알아?」

「……어음, 몇 시지?」

「흐음…… 아, 방금 막 10시가 넘었어.」

「엣.」

 

네이처가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고 질린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그 얼굴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달리기에 열중이었던 거야?」

「응. 진짜 몰랐어.」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여태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온 연락이 산더미일 게 안 봐도 뻔했다.

미안한 마음에 「……미안」이라 사과하자, 그녀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자. 밥 아직 안 먹었지?」

 

네이처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다정했다. 매일같이 오버 트레이닝을 해도, 아무리 늦게 귀가해도 결코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아무 말 않고 그저 상냥한 눈빛으로 지켜봐 주었다.

괜히 그 다정함에 닿고 싶어져서, 의지하고 싶어져서 「네이처」라고 이름을 불렀다.

 

「나, 달릴 수가 없어.」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억누르고 참아 왔던 감정들이 단번에 터져 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

눈앞의 그녀가 살짝 놀란 것처럼 눈동자를 크게 떴으나, 「응」이라며 금방 대답해 주었다.

 

「달리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몸도 다리도 따라와 주질 않아……」

「……응.」

「부상 입기 전과 마음은 똑같은데, 왜 이런 걸까.」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네이처의 모습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다들 내게 기대를 걸고 있어. 다시 달려 주기를, 한 번 더 아리마 때처럼 부활극을 보여 주기를.」

 

입원 중일 때부터 세간은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달리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토카이 테이오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부상을 극복해 왔으니까, 이번에도 분명 돌아올 거야.』

『전처럼 부활하고 1착까지 쟁탈해 내는 모습을 다시 보여 줘.』

『그 제왕이 이런 식으로 끝날 리가 없어.』

TV를 보든 인터넷을 보든 이런 이야기가 가득했다.

처음에는 기뻤다. 기대해 준다는 말은 즉, 나를 믿어 준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그 마음에 응하고 싶은데, 달리고 싶은데…… 읏, 달릴 수가 없다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몸을 혹사해 보아도 그때의 달리기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날이 지날 때마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차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나를 기쁘게 해 줬을 터인 기대가 어느샌가 부담으로 변해 있었다.

 

「테이오……」

 

눈동자 안에 전부 거둘 수 없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걸 깨달은 순간,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넘쳐 멈추지 않았다.

 

아아, 말해 버렸어.

눈물까지 흘려 버리고, 큰일이네…… 이것 봐, 네이처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 얼른 그쳐야 하는데.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는데, 무언가가 부드럽게 손목을 붙잡아 멈췄다.

눈앞에 있던 네이처가 미소를 지었다.

 

「충분해.」

「어……?」

「……이제 골인해도 되지 않을까?」

 

그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는 찰나, 네이처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것이 보였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나, 더 이상 테이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읏.」

「쭉 옆에서 봐 왔으니까 네가 여태까지 얼마나 열심히 재활 훈련에 힘썼는지도, 얼마나 열심히 트레이닝했는지도 다 알고 있어. 그래도 있지, 이제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 부상이 다 나았는데도 괴로워할 필요는 없잖아.」

「네이처……」

「달릴 수 없게 되더라도, 네가 토카이 테이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너무도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네이처의 어깨를 물어뜯을 듯이 고개를 파묻으며, 웅크린 채 울고 있던 진심을 토해내고.

 

 

그날, 나는 은퇴를 결심했다.

 

 

며칠 후, 네이처와 휴일을 맞춰 함께 URA 본부가 있는 빌딩으로 찾아가, 나는 은퇴를 신청했다.

접수처 직원이 깜짝 놀란 얼굴을 보였으나, 곧바로 수속을 진행해 주었다. 머지않아 별실로 호출을 받았고, 네이처에게는 로비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가지 서류에 사인을 하고, ID 카드를 반납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것만으로 URA 소속 경기자 '토카이 테이오'의 등록은 말소되고, 그와 동시에 스폰서 기업과의 관계도 사라진다.

URA 사무국 사람이 회견을 여는 것은 어떻겠냐 권유했지만, 매스컴의 질문에 답할 만한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제안은 거절했으나 대신 매스컴 각 사에 전하는 친필 편지를 두고 왔다. 오늘 밤쯤에는 TV에서 보도할지도 모른다.

실감이 안 나.

고작 이 정도 수속으로 나의 경기자로서의 인생이 끝을 고했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고 허무한 은퇴인가.

 

달리는 것만이 전부였던 나는, 이제부터 대체 무얼 하며 살아가면 좋을까.

 

멍하니 로비로 걸어 나와 네이처를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전화를 걸어 볼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 빌딩 밖으로 나오자, 마침 네이처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참아.」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옮겨 보니, 눈물로 얼굴을 적신 어린 우마무스메와 시선을 맞춰 얘기하는 네이처가 보였다. 넘어지기라도 한 건지 그 아이의 무릎이 새빨갛게 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네이처는 가방에서 포켓 티슈와 반창고를 꺼내, 재빨리 피를 닦고 반창고를 찰싹 붙여 줬다.

 

「돌아가면 바로 어머님께 소독해 달라고 해야 한다?」

「어머님?」

「아, 미안. 엄마 말이야.」

「응, 고마워!」

「인사까지 잘하고 기특하네. 조심해서 돌아가.」

「응, 바이바이! 언니!」

 

어린 우마무스메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모습을 네이처는 부드러운 미소로 배웅해 주었다.

바로 말을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웠던 탓에 나도 모르게 그만 방관하고 말았다.

나를 눈치챈 건지 네이처가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웃었고, 그때에야 비로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끝났어?」

「아, 응……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냐,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는걸. 돌아갈까?」

 

자연스럽게 내민 그녀의 오른손.

부상으로 고생할 때, 네이처는 헌신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재활할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나를 지탱해 줬으니 이렇게 손을 내미는 게 버릇이 된 거겠지.

평소 같으면 기쁜 마음으로 그 손을 잡았겠지만, 지금은 망설여졌다.

 

「테이오?」

「……응, 괜찮아. 고마워.」

 

──나는 이대로 네이처의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 나는 그 손을 잡는 것을 피하고 말았다.

 

 


 

 

그 뒤로 무슨 일을 하든 의욕은 생기지 않은 채, 불확실한 나날이 계속됐다.

지금까지 '달린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그걸 잃고 나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네이처가 데이트를 권유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점가 자리를 알선해 주거나 했으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속 안개는 걷힐 줄을 몰랐다.

 

 

베란다로 나가자 찌는 듯한 더위가 온몸에 착 달라붙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태양과 푸른 하늘과 흰 뭉게구름.

너무 더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솟구쳤다.

서둘러 빨래를 널고 집 안으로 대피해 선풍기 앞에 앉아 잠깐 바람을 쐬었다. 에어컨 온도도 조금 낮춰 익어 버릴 듯한 피부를 조금이라도 식히려고 애썼다.

TV에서 잉꼬부부라 유명했던 배우 부부의 이혼을 보도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내 은퇴 소식을 전하기 바빴는데, 요 며칠은 이 내용만 주야장천 나왔다.

 

『블로그에는 화목해 보이는 사진이 자주 올라왔었는데 말이죠.』

『올 4월에 두 분이 함께 아타미 여행을 갔다 오신 것 같은데요.』

『관계자가 전해 준 정보에 따르면, 금전적인 문제가 원인이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둘이 정한 일이니까 가만두면 좋을 텐데.

언제든 꼬치꼬치 캐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언론에 질려 TV 전원을 끄고 충전 중이던 핸드청소기를 꺼냈다.

 

오늘은 밤까지 네이처가 없는 날이다.

어머님께서 감기에 걸리셔서 그녀 혼자 가게를 보게 되었으니, 폐점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돌아와야만 했다.

반대로 나는 오늘도 아무 일정이 없었으므로, 평소처럼 빨래를 하고 나서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평소에 하는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매트리스 청소에 주방이나 목욕탕 물때 제거, 창문까지 닦은 뒤에 트레이닝 도구가 모여 있는 방문을 열었다.

이제 더 이상 달릴 일이 없었으니 여기에 발을 들인 것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어느새 창고처럼 변해 이곳저곳에 먼지가 가득했다.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바닥에 쌓여 있던 트레이닝 교본을 책장에 한 권씩 원래대로 꽂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두꺼운 책을 정리하려고 집어 든 순간, 무언가가 발 언저리에 떨어졌다.

 

「……아.」

 

떨어진 건 반지 카탈로그였다.

작년 6월, 네이처에게 프러포즈하려고 주얼리 매장을 들렀을 때 받은 것이었다.

그래, 여기라면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해 꽂아 놨던 것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은 후, 카탈로그를 주워 들어 안을 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반지 사진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속이 무언가에 조이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녀 곁에 있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달릴 수 없게 된 나. 텅텅 비어 버린 나. 그런 나와 함께 있는 네이처는 과연 행복할까?

부상을 입고 나서도 은퇴하고 나서도, 네이처는 늘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 줬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던 달리기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1착을 따서 미소와 함께 선물해 주는 것도 이제 할 수 없었다.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이런 내가 프러포즈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샌가 시야가 흐릿해졌고, 슬픔과 분함이 눈사태처럼 막무가내로 밀려와 카탈로그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날 밤, 나는 네이처를 마중하러 집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밖은 더웠지만, 그래도 낮과 비교하면 꽤 쾌적했다.

밤길을 걸어 상점가를 빠져나와 가게 앞으로 가 보니,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있는 네이처가 보였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젊은 남자 여러 명과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손님이 비틀거리며 떠나는 걸 보고 나서야 「네이처」라고 말을 걸었다.

 

「에, 테이오? 왜…… 혹시 마중나와 준 거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뒷정리가 남았다는 네이처를 마저 도와주고 나서 함께 귀갓길에 올랐다.

오늘 밤은 이런 손님이 오셨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즐겁게 얘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 옆모습을 바라봤다.

 

네이처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다.

애교가 많고 사람을 잘 보살피는 데다가, 예쁘고, 귀엽고, 배려심도 깊으며 요리까지 잘하니까.

게다가 그 무엇보다도, 상냥한 사람이다.

 

문득 머릿속에 아까 그 남자들과 이야기하던 모습과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떠올라, 네이처가 엄마가 된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는 미래도 분명히 있었을 거다.

지금까지 네이처에게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내가 그걸 전부 빼앗아 버렸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네이처는 워낙 인기가 좋으니까, 금방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싫어진 게 아니야. 좋아하니까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야.

 

「테이오? 듣고 있어?」

 

못마땅한 듯이 눈썹을 찡그린 네이처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듣고 있다니까」라고 거짓말했다.

 

 

 

「나 좋아해?」

 

날짜가 바뀌기 직전,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던 네이처에게 그렇게 물었다.

정말 아무 맥락도 없이 나온 질문이었으니, 네이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대답했다.

 

「그거야 뭐…… 좋아하지.」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고마워. 나도 네이처를 좋아해.」

 

네이처와 같은 마음을 말로 표현하며,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응. 좋아…… 좋아하고, 소중해. 그래서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

「……테이오?」

 

분위기일까, 공기일까. 아니면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 행동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네이처가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에 힘없이 미소 지으며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짜냈다.

 

「하지만 나랑 있어 봤자 더 행복해질 수 없어. 그러니까.」

「그 이상 말했다간 화낼 거야.」

 

강한 어조의 목소리가 목소리라는 실을 잘라 버렸다.

생소한 목소리에 순간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윽, 미안…… 그래도 끝까지 들어 줘.」

「아니, 듣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자기 귀를 가리더니, 심지어 얼굴까지 돌려 나를 외면했다.

 

「네이처.」

 

어떻게든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자,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보니 가슴속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겠지. 지금까지 몇 년이나 사귀어 놓고, 심지어 동거까지 하던 애인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순서대로 얘기해야 했음을 통감했다.

 

「그야…… 나로선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으니까.」

 

내가 다치고 나서부터 네이처의 웃는 얼굴을 보는 일이 적어진 것도, 슬퍼 보이는 얼굴을 보는 일이 많아진 것도.

네가 좋아한다 말해 주었던 달리기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도, 아이에게 보이는 네 미소가 무척이나 포근했던 것도, 나와 함께 있어선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것도.

그 전부를 이야기했다.

 

「……그게 뭐야.」

 

네이처의 목에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태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같이 보냈는지 알기는 해……?」

 

그녀의 손이 매달리듯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는 것도, 뿌리치는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글썽이는 네이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내 일상에는 네가 있는 게 당연해졌단 말이야…… 이제 와서 헤어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응…… 미안.」

「……나, 테이오가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야…… 슬픈 표정을 짓는 일이 늘었으면 뭐 어때, 네가 슬퍼할 때는 나도 같이 슬퍼하게 해 줘.」

 

네이처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나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옷 주름이 더 깊어져 갔다.

 

「나는…… 네 달리기만을 좋아했던 게 아니야…… 테이오를 좋아했던 거라고.」

「……응.」

「확실히 우리 사이에서 아이는 생길 수 없어. 하지만 너와 함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단 말이야……」

 

네이처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크게 심호흡한 후 나에게 물었다.

 

「나를 좋아하는 거 맞지……?」

「응…… 좋아해.」

「그러면…… 그러면 대체 왜……!」

 

이젠 거의 오열에 가까운 목소리와 함께 눈물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마음속이 삐걱거렸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볼을 향해 오른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서 살짝 힘을 빼며 네이처가 가냘프게 웃었다.

 

「……내칠 생각이었으면 싫다고 말했어야지. 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야.」

 

그 말에 가슴속이 도려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급히 오른손을 거두려고 했으나, 네이처의 두 손에 붙잡혀 저지당했다.

 

「좋아하면 그걸로 됐잖아……」

 

그대로 오른손이 그녀의 가슴팍에 안겼다. 힘을 주면 쉽게 떨쳐낼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쭉 함께하고 싶어…… 테이오는 아니야?」

 

네이처가 이렇게나 솔직하게 마음을 부딪쳐 주었는데도, 내 마음은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서 「……미안」이라고 목소리를 짜내자,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아 줘.」

 

내가 울린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네이처가 슬퍼하면 나도 슬펐다. 네이처가 기뻐하면 나도 기뻤다.

네가 우는 모습을 보면 나도 울고 싶어져.

그건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야.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울지 마.

 

우는 동안에도 네이처는 내 오른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이윽고 손을 붙잡고 있던 힘이 빠진 건가 싶더니,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니 눈물로 뺨을 적신 채 꿈속에 빠진 것이 보였다.

그대로 네이처를 침실 침대 위로 옮기고 이불을 덮어 줬다.

젖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아 주고 있노라니,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숨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었으나, 그 눈동자가 열리는 일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익숙한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몽실몽실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해 준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내칠 생각이었으면 싫다고 말했어야지. 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야.』

 

그 말이 백 번 옳았다.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이별을 화두에 올리다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있을 리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와 헤어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네이처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천천히 손등으로 뺨을 쓰다듬으니, 너는 마치 고양이처럼 손등에 뺨을 문질렀다.

 

진짜 헤어지면 이제 이 잠든 얼굴도 볼 수 없겠구나.

정말 좋아하는 너의 요리도 먹을 수 없게 될 거고,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해 봤자 그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고, 너는 내 곁을 떠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미소를 보여 주게 되겠지.

 

 

──싫어라.

 

 

네 옆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있는 것을 상상해 보았을 뿐인데, 가슴에 안개가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네이처에게 먼저 고백한 사람은 나였다.

마야노로부터 네가 고백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소등 전에 네 방으로 무작정 들이닥쳤었지.

 

『그야, 나도 네이처를 좋아하니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시끄러웠고, 얼굴 전체가 뜨거웠다.

그래도 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눈을 크게 뜨고 볼을 붉게 물들였던 그 모습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읏…… 미안.」

 

나는 바보야. 너에게 고백한 순간부터 내 마음은 정해져 있었는데.

내 마음은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나도……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잠들어 있는 네이처에게 그리 전하고, 숨을 죽인 채 혼자 눈물을 흘렸다.

 

 

 


 

 

테이오 한 대만 때리게 해 줘,,,,,,,,

뭔가 10년 전쯤 백합물에서 자주 보던 느낌이라 반갑고 정겨우면서도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 화였습니다.

5편은 다음 편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래도 번역하면서 참 재밌었고 공감도 많이 했네요.

꿈을 걸으라는 주제곡을 가진 테이오가 사람들이 건 기대에 무너지는 것도 씁쓸하고요.

중간에 나온 골인해도 되지 않을까? 이 대사도 보고 흠칫했어요.

예전에 AIR라는 작품이 떠올라서...

 

아 맞다 일러와 글 작가님이 동일합니다.

이 테이네이 시리즈는 저 상태를 베이스로 상상하시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곧 클라이맥스라 허락을 구해 가져와 봤어요.